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계 한국인 (문단 편집) == 과거의 사례 == [[고대]]에도 [[한반도]]와 [[일본 열도]] 간에 [[도래인]]과 같은 인구 교류가 있었다. 도래인은 보통 한반도나 [[중국]]에서 건너간 사람을 말하는데,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면 건너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다. 당대의 기록들을 보았을때 인구교류가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. [[석탈해]] 설화를 볼때 탈해라는 인물이 대체로 일본쪽에서 온 인물이라는 언급이 있고, ~~탈해의 야바위로 집을 뺏긴~~ 신라의 개국공신인 [[호공]]은 아예 왜인이라 써있는데다 왜구도 오고갔다라는 기록까지 있으니, 적어도 그 이전부터 일본에서 한반도로 온 사람도 있었다는것 정도는 알 수 있다.[* 다만 하플로 그룹상으로 보았을때 일본인들의 특징적인 유전자인 D1b는 해안지역을 제외하면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(2~5% 이내) 야요이인들이 주로 한반도나 중국에서 왔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.] 그렇지만 [[석탈해]]의 출신이 일본계인지 당시 [[에미시|일본 동북부 지역이나 홋카이도에 살던 아이누계 종족]] 아니면 캄차카에서 거주한 종족이었는지는 설이 갈린다. 또한, [[왜구]]의 침입이 빈번했던 [[여말선초]] 시기에도 [[고려]]나 [[조선]]에 [[https://cafe.daum.net/historywar/2LjP/1874|노예로 끌려오거나]] 무리에서 낙오하여 노비가 되거나 투항, 귀화한 왜인들이 다수 있었으며, 이들은 대체로 [[쓰시마|대마도]] 출신이 많아 조선 초기 대일외교와 왜구 토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. >"[[명나라|대당]], [[유럽|남만]], [[조선|고려]]에 [[일본인]](日本人)을 매견(賣見: 팔아서 보내는것)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(曲事(くせごと): 부정한 일 = 범죄)이며 덧붙여, 일본에 있는 사람을 매매하는 일을 정지시킨다. 굳게 정지하지 않으면 엄벌해야 할 자이다." > >大唐、南蛮、高麗え日本仁(日本人)を売遣候事曲事(くせごと = 犯罪)。 付(つけたり)、日本におゐて人之売買停止之事。 右之条々、堅く停止せられおはんぬ、若違犯之族之あらば、忽厳科に処せらるべき者也。 >---- >1587년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가 선언한 일본인의 인신매매 금지 포고령. 당시 일본인 노예들의 주 종착지는 [[포르투갈령 마카오]]였으나, 조선 역시 노예 매매국에 언급되어 있다.[* 이세신궁문고 소장 「어주인사직고격」(伊勢神宮文庫所蔵 「御朱印師職古格」)] 이들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바로 [[임진왜란]]과 [[정유재란]] 당시로 히데요시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조선에 귀순, [[항왜]]로 발탁되어 활동했다.[* [[이뭐병]]이라고 생각하기 쉬울지는 모르나 일본이 통일된지 얼마 안되던 시기로 당시 일본군들 가운데는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를 따르는 파와 거부하는 파로 나뉘어져 있어서 왜란중에도 많은 대립이 있었다. 당장 2번의 왜란후 일본에서 벌어진 [[세키가하라 전투]] 참가자의 상당수가 이들 왜란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. 전부 다는 아니어도 당시의 일본군 가운데는 명목없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생각을 가진 군인들도 상당수 되었는지라 이런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.][* 당장 [[가토 기요마사]]와 [[고니시 유키나가]]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.] 1593년부터 투항하는 자들이 늘었고 [[포로]] 개념 따윈 없었던 당시 전투답게 처음엔 죽였으나[* 더우기 왜란 초기 당시 민간인들이 당했던 학살이나 약탈, 납치 등을 생각하면 복수심에서라도 살려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.] 1594년부터는 전략적 차원에서 항왜를 받아들였다. 당시 억지로 끌려와 거의 [[총알받이]] 신세였던 파벌의 일본군이 탈영하여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가 목책을 두를 정도였다고 한다. [[조선왕조실록]]에 따르면 약 1만 명 정도였다고. 다만 교차 검증이 안 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. 전술적으로 이들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. [[조총]] 생산 라인의 핵심 장인으로 채용되기도 했고, [[이괄의 난]]을 진압하거나 [[병자호란]]에 참전하기도 했다. 이들은 일본인 마을을 이뤄 살았으나 조선인과의 통혼에 따라 차츰 사라졌으며,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커뮤니티가 완전히 소멸되어 일부 족보 등에만 남아있다. 당시 [[일본]]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역시 현재는 커뮤니티가 소멸했으나,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강했던 일본의 사회 분위기 덕분에 19세기까지 어느 정도 조선인 마을이 존재했다고 한다. [[태평양 전쟁]] 당시의 일본 외무상이었던 [[도고 시게노리]](박무덕)가 대표적인 케이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800px-Families_whose_ancestors_came_to_Korea_with_a_Japanese_Kato_Kiyomasa.jpg]] 대표적인 사례가 사성 [[김해 김씨]] [[김충선]] 가문의 사례이다. 김충선이 대구 우록동으로 낙향한 이후 가문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는데, 1904년 대한제국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군 및 일본의 탐험가들과 조우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